□탐방지: 충청북도 괴산군 속리산 (국립공원 인증 5회차, 명산 100 인증 5봉째)
□날짜: 2020.12.12(토)
□탐벙코스: 법주사주차장 - 세심정 - 문장대 - 문수봉 - 신선대 - 비로봉 - 천왕봉 - 상환암 - 세심정 - 법주사 원점회귀
□찾아가는 길: 원주에서 자가용 이용 07시 출발, 법주사 주차장(주차비 4천원, 문화재 입장료 4천원/인)
코로나로 인해 단체산행을 다니지 않은 지가 어언 1년이 되어 가는 요즘
우리나라 근대사에 역사적인 획을 그은 사건이 있었던 날인 12월 12일을 맞이하여 세속에 헝클어진 마음을 산속에 유기하고자 속리산을 찾기로 한다
속리산은 한국 8경 중의 하나이며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속세를 떠나 돌아온다는 뜻의 이름을 갖고 있다
문광저수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 우리나라에서 가을 은행나무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문광저수지를 지나가기에 잠시 내려서 구경을 한다
저수지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 의림지 주산지 주남지 벽골제 등등 무수히 많은데 문광지는 나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대한민국 진사라 자칭하는 찍사들이라면 한 번쯤 다녀갔을 법한 엄청난 명소이다
문광저수지 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 16

▼주산지 왕버들이 여기에 분가를 했는가

▼2km의 은행나무길이 가을에는 인산과 인해를 이룬다

▼오늘의 코스는 세심정을 거쳐서 문장대 비로봉 천왕봉을 지나 세심정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 일주문인가


법주사 세조길
법주사와 복천암 입구 세심정을 잇는 2.4km 구간의 탐방로이며
세조가 법주사를 찾아 법회를 열고 산내 암자인 복천암에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행차하던 길을 복원하여 2017년 9월에 만들었다
태조 이성계가 훈요십조에서 사찰을 주의하라고 유언을 남겼건만 증손자인 세조는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목욕도 하고 여기 법주사에 와서 대사도 면담했으니 참 어른 말 지독히도 안 듣는 왕이었던 것 같다


▼법주사 지나 저수지 갓길로 진입할 때 만나게 되는 널판지바위


▼저수지 옆으로 데크길을 만들어 놨다

목욕소
『 '마마의 피부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하지 마십시오'
약사여래의 명을 받고 월광태자가 복천암에 머물던 세조에게 나타나 이 말을 하고 홀연히 사라졌고 세조는 월광태자의 조언을 듣고 이곳에서 목욕을 하니 몸의 종기가 깨끗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라고 안내문에 쓰여 있다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서 목욕을 할 때 동자로 변신한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주어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목욕을 하고 깨끗이 나았네

▼목욕소

▼평탄한 길

세심정(洗心亭)
마음을 씻어주는 정자
아주 깨끗한 이름이어서일까 세심정으로 검색을 해보니 전국에 수두룩이 많이도 나온다
내가 자주 가 봤던 양평 두물머리에도 세심정이 있으니 훌륭한 이름으로 인정한다
시간도 여유가 있으니 이곳에서 마음을 씻는 차나 한 잔 마시고 가자고 했더니 동행인 왈, 이후로도 찻집은 계속 나오니까 여기는 그냥 가자고 한다
과연 찻집은 계속 나타났고 막걸리를 낱잔으로 파는 찾집도 있었다



▼이기 뭣고?

왕이 다녀간 복천암(福泉庵)
아래 사진의 안내문이 재미있다
공민왕과 세조임금은 복천암에 다녀간 뒤 무엇을 하사하였을까요?
공민왕
복천암 극락보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습니다
세조
복천암에 기거하고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고 나라의 번창을 빌며 대법회를 열고 복천사에 쌀 300석과 노비 30구(口) 전(田) 200결을 하사했다고 전해집니다(조선왕조실록)
신미대사
세조가 수양대군시절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 편찬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 당시 편찬된 책자들은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현재 복천암에 신미대사 부도탑이 있다


▼바위가 문이라고 장구한 세월을 온 몸으로 밀어 댄 신갈나무

문장대(文藏隊)
문장대는 큰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해서 운장대(雲藏臺)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할 때 이곳에 올라가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세조가 문장대 위에서 신하들과 시 짓는 놀이를 했다고 알고 있었기에 이전에는 문장을 文章으로 오해했었다
그런데 세조가 바위 위에 짱 박혀서 글을 읽었다고 文藏이라 했다니 예전에 바위가 구름 속에 짱 박혀 있어서 雲藏이라 했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문장대의 모습은 이곳에서 보는 것 보다는 멀리에서 바라볼 때가 더욱 신비롭다




▼문장대 정상 넓적 바위


▼문장대에서 바라보는 풍광


▼신선대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보는 문장대

▼나무가 갈라 놓은 괴석

▼공룡바위?

▼계단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본래의 바위를 쪼아서 만들었다. 혹시 조선시대 때 만든 것인지

▼신선대에서 컵라면 한 사발씩 마시고 간다. 2천 원이었던가?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문장대 방향

▼코스지도에 있는 '입석'이 혹시 이곳은 아닐런지

▼고릴라 바위



▼석문

▼천왕봉


▼상환석문 입구

▼상환석문 내부. 이ㅇㅇ 이 양반은 어느 시기에 뭐하는 사람이었을까

▼상환석문 출구




▼상환암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길에서 올려다 보는 상환암

▼상환암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계단참 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글들이 있다

▼친환경 시멘트 다리

▼주변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이용됐던 절구


▼아침에 지났던 저수지를 오후에 다시 보니까 사뭇 다른 분위기


▼널판지 바위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가녀린 나무

법주사(法住寺)
사적 제503호이며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가 창건했다
절의 이름에 대한 설화가 있는데
의신조사가 천축국에 갔다가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던 중 이곳에서 나귀가 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노새의 기이한 행동에 의신조사가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가 절을 지을 만한 마땅한 곳임을 알아차리고는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
법주사의 3가지 국보
①국보 제 55호 팔상전(八相殿)
팔상전 내부에 부처님을 일생을 표현한 8면의 그림이 있으며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이기에 보여줄 수가 없다

팔상전의 한자가 달라서 찾아봤더니 八과 捌은 이형동의자(異形同義字)로 같은 '여덟 팔'자였다
내가 무지한 것인지 같은 글자라도 어렵게 쓰길 좋아하는 유식한 이들의 습성 때문인지 하여튼 헷갈린다

②국보 제 5호 쌍사자 석등
막눈으로 보면 전혀 국보스럽게 보이지 않아서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거친 바위를 이곳으로 굴려와 정성스럽게 일일이 정을 쫗아 굴곡을 만들고 눈과 갈기를 다듬는 장인의 숨결을 느껴야 한다
쌍사자가 쌍둥이처럼 닮았으나 입의 모양이 다르다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설법을 전파하는 교종을 표현한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는 참선을 강조하는 선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에 그슬린 흔적은 무어지?


③국보 제 64호 석련지(石蓮池)
대부분 절에는 연못을 만든다고 한다
연못을 만드는 이유는 목재 건물이 대부분인 절에 화재가 났을 때 소화수로 이용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법주사 뒷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절의 모양이 배처럼 생겼고 그래서 절 마당에 연못을 만들면 배가 가라앉을까 봐 실제로 연못을 만들지 않고 이렇게 돌로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마침 지금 석련지는 대수술 치료중이라 대면은 할 수 없고 공사장 가림막에 안내되어 있는 사진으로 감상한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때(776년) 진표율사가 처음으로 금동미륵대불을 만들었는데 조선 고종 때(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건축비를 마련하려고 이곳 대불과 당간지주를 뜯어다가 당백전을 만들었다
1939년부터 장석상 주지스님이 시멘트미륵불을 조성하던 중 6.25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64년에서야 완성되었다
시멘트미륵불이 노화되어 붕괴 적전에 이르자 1986년에 해체되었고 1990년에 시멘트미륵불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제해 청동미륵불이 만들어졌다
이후 청동의 부식이 심해져서 2002년에 표면 전체를 벗겨내고 골드 펄이라는 인조 금을 이용해 금박을 덧씌워서 지금의 금동미륵불이 탄생되었다
불상의 높이가 33m이고 여기에 들어간 인조 금의 무게가 무려 80kg이나 된다
그나저나 흥선대원군 참 못 말리는 대감이었다
이걸 뜯어다가 동전을 만들 기발한 생각을 하다니 기가 막혀서 콧물이 나오네


법주사 당간지주
고려 목종 때(1006년) 높이 16m의 철제 기둥으로 만들었으나 역시 대원군의 전국 쇠붙이 몰수령에 의해 뜯겨졌다가 순종 때(1910년) 지금의 22m 철당간으로 복원되었다

속리산 정이품송
천연기념물 제103호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마가 나무에 걸려서 세조가 '연(가마)이 나무에 걸린다'라고 말하자 나무가 스스로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가마를 지나가게 했고 이후 세조는 소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소나무이다
예전에 우표 사진으로도 나올 만큼 아름다운 수형을 자랑했었으나 2004년 폭설 때 한 쪽 가지가 부러져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남은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정이품 장관급의 품위는 유지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천연기념물이어서 벼슬도 있지만 부인도 있다
정이품송과 같이 연세가 600살이고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된 정부인 소나무
여기에서 7km 떨어져 있는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49-4번지에 있으며 정이품송과 2002년에 혼례를 올린 부부사이이며 지금도 계속해서 후계목 자손들을 길러내고 있다고 한다
다

예상 외로 산행시간이 길어져서 정이품송을 자가용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창문 밖으로 감상하며 부랴부랴 돌아오면서
2020년 마지막 산행을 여기에서 마친다
▼오늘 지나온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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